쏴아아 하고 빗소리가 창문 너머로 들려온다. 불이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하는 이 좁은 방 안을, 그 소리가 가득 가득 채우고 있다. 마치 기름이 끓는 듯도 하고, 또는 투명한 작은 구슬들이 와르륵 쏟아져 내리는 듯도 하다. 갑자기 모든 생각들이 의식 아래로 잠겨져 내리고 어느덧 빗소리가 나머지 부분을 잠식하여 간다. 서서히 의식조차 무언가의 수평선 너머로 잠겨가기 시작할 때, 굵은 빗방울 소리 사이로 신음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는 소리 - 어쩌면 듣는 이까지도 고통스럽게 만드는,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소리이다. 모래시계를 한번 한번 뒤집으며 사색에 잠기려 해도 그것은 모래시계가 뒤집힐때마다 더욱 더 억세게 내 머릿속을 죄여온다. 결국 몇번째의 뒤집음 끝에 더이상은 그 소리를 참지 못하게 된다. 너무나 아픈 그 소리가 심장을 창처럼 꿰뜷는다. 어쩌면 빗방울 소리 속에 뭍힐법한 그 작은 소리가, 어떻게 나를 이렇게 흔들어 놓을 수 있는 것일까.
결국 창문을 열어 밖을 내다본다. 너무나 평범한 비오는 풍경. 풀잎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그 모습 하나하나가 아름답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자꾸만 그 소리가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다시 방에 돌아와 한번 더 모래시계를 뒤집어 본다. 그러나 여전히 같은 상황은 펼쳐지고 있었다. 혹시나 이것이 모래시계에서 나는 걸까? 애석하게도 귀에 모래시계를 대어봐도 여전히 소리는 멀리서 들려오는 것이다. 그렇게 5분여치의 하얀 모래가 아랫칸으로 스스슥 하며 완전히 떨어졌다.
더이상 이 호기심을 참을 수 없다. 우산을 챙겨 집 밖으로 나간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투둑투둑 내리고 있었다. 그 고통의 소리만이 멀리서 미약하게 들려올 뿐, 그것 말고는 세상은 고요하며 아름다웠다. 우산을 쓰고 주변을 돌아다녀 보았지만 여전히 보이는건 풀잎과 나무들, 말없이 서있는 높디높은 건물들… 아무리 찾아도 신음의 근원은 보이지 않는다. 아까 가지고 나온 모래시계를 다시 뒤집어본다. 주머니 속에서 모래는 흐르고 있겠지. 그 원인을 찾기 전에 조금은 이 아름다운 세상을 구경해도 좋지 않을까? 잡다한 생각에 빠져 어느덧 집 멀리로 나와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집에서 떨어지게 되자 핏자국 하나가 바닥에 떨어진 것이 보였다. 너무나도 선명한 그 자국에 그만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다. 이 피는 누구의 것일까 하는 호기심에 나는 쭈그려 앉아 핏자국을 만저보려고 했다. 손이 우산 밖으로 나가는 순간 빗방울 하나가 손 끝을 스치고, 갑작스러운 고통에 재빨리 손을 빼낸다. 뚝 뚝. 새빨간 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처음 겪어보는 그 고통. 순간적으로 눈물이 나오며 빗방울이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괜히 밖으로 나왔다는 느낌이 처음으로 들었다.
하지만 이미 나온 이상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최대한 비를 맞지 않으려 우산을 꼭 쥔채로 핏자국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를 이리저리 둘러본다. 그래, 저쪽으로 이어지는구나! 하지만 그 길의 끝에는 안개로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몸을 스멀스멀 기어올라온다. 심장이 빠르게 뛴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왠지 모르게 가야만 한다는 그 느낌이 생각을 지배하고 있다. 이렇게 하면 두려움이 좀 나아질까, 괜시리 모래시계를 꺼내어 다시 뒤집어 넣어준다. 어쩐지 모래가 주머니 속에서 흐르고 있다고 생각하니 알 수 없는 안정감이 느껴지기도 하다.
한 발짝 한 발짝 조심스레 길을 걷는다. 빗방울이 그렇게 아프다는 것을 깨달아서 그런걸까, 더욱 더 걸음이 조심스러워진다. 핏자국을 따라 점점 안개속으로 나아갈수록 심장이 더욱 빨리 뛰고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이다. 안개가 스칠수록 어쩐지 소름이 돋기도 한다. 미지의 세계는 굉장히 무섭다. 시뻘건 핏자국이 점점 조밀조밀해지며 이리저리 튄 작은 자국들이 거칠어지는 느낌이다. 뒤를 보아도 이제 전의 풍경은 보이지 않는다. 온통 새하얗고 싸늘한 안개일 뿐. 길조차 가늠할 수 없는 곳에서 그저 핏자국 하나만 따라 걷고 있었다. 이제 내게 믿을 것은 우산과 주머니 속의 하이얀 모래시계 뿐…
계속 길을 걷다보니 핏자국은 너무 난잡해져서 방향을 구별할 수가 없다. 길을 잃어버린걸까… 안개속을 이리저리 둘러보지만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던 중 무언가의 실루엣이 보인다. 그곳으로 조심스레 걸어가본다. 사람이다! 드디어 여지껏 나를 괴롭혀온 신음의 정체를 알아냈다고 생각하니 첫번째로 기쁨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 사람의 몰골이 말이 아니다. 빗방울 하나하나가 그의 피부에 가는 상처를 내며 그를 고통에 빠트리고 있었다. 이미 그의 피부는 피로 범벅이 되어있는 것이었다. 연민이 마음속에서 격렬히 타오른다.
어쩌지… 저 사람을 어쩌면 좋지? 고민 끝에 그 사람과 우산을 같이 쓰기로 한다. 고맙다. 이 말을 들어본것은 처음이다. 빗방울이 내 등을 마구 할퀴고 지나가지만 지금 상황에 이것 정도야. 하지만 이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져야 할까? 그리고… 여전히 빗방울이 그 사람을 때리고 있다. 이 상황은 전혀 좋은 방법은 아닌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달리 선택할 차선책이 있는 것도 아니다. 괜히 다시 한번 모래시계를 뒤집어놓는다. 시간이 모래를 타고 계속해서 흘러내리고, 초조한 마음은 오히려 수면 위로 부글부글 올라온다.
또 다른 방법이 떠올랐다! 집에 분명 우산 하나가 더 있을 것이다. 그 사람에게 잠시만 버텨달라 말한 후 왔던 방향을 되돌아 뛰어간다. 최대한 전속력으로, 그에게 더이상의 고통이 가해지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빗방울이 조금씩 내 몸을 그어가면서 고통이 느껴진다. 이 고통이 나를 천천히 세워버리는 것이다. 조금만 천천히 걸었다가 다시 뛰어가자. 다시금 우산을 꼭 잡게 된다. 그런데 무언가 잘못되었나? 이 방향이 맞을텐데? 아무리 땅을 훑어봐도 온 사방이 피로 채워져 있어 방향을 알 수가 없다. 불안해서 모래시계를 뒤집어 본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안개는 여전히 짙다. 변한것은 이 규칙없이 흩뿌려진 시뻘건 피들…